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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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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는 1755년에 태어나 프로이센 군의 군제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하노버 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군사 이론가로 명성을 얻었고, 프로이센으로 이적하여 군사 교육과 개혁에 힘썼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패배 이후 군비 재편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어 병역 제도 도입, 장교단 개혁, 참모 제도 확립 등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1813년에는 병참총장으로 복귀하여 전쟁을 지휘하다가 부상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개혁은 프로이센 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근대 참모 본부 제도의 아버지로 불리며, 클라우제비츠 등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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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기본 정보
프리드리히 부리가 그린 폰 샤른호르스트 장군 초상화
프리드리히 부리가 그린 초상화, 1810년대 경
전체 이름게르하르트 요한 다비트 폰 샤른호르스트
출생1755년 11월 12일
출생지하노버 선제후국 보르데나우
사망1813년 6월 28일
사망지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안장 장소인발리덴프리드호프
서명
군 경력
소속프로이센 왕국
복무 기간1778년–1813년
최종 계급중장
나폴레옹 전쟁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훈장푸르 르 메리트
관직
프로이센 참모본부 총장

2. 생애

샤른호르스트는 1755년 11월 12일 하노버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 1773년 빌헬름스타인 사관학교에서 군사 이론을 공부했다. 1778년 하노버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교관으로 복무하며 군사 관련 저술 활동에 힘썼다. 『군사저널』을 창간하고, 『장교를 위한 응용군사과학』, 『야전필휴』[4]등을 출판하여 군사 이론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1792년 대위로 진급한 후,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하여 네덜란드에서 첫 실전 경험을 쌓았다. 1794년 메닌 포위전에서는 뛰어난 구출 작전을 지휘하여 소령으로 승진하고 하노버 참모본부에 합류했다. 1795년 바젤 조약 이후에는 프랑스 혁명군의 승리 요인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여 주목받았다. 1801년, 프로이센 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프로이센으로 이적했다.

프로이센에서 샤른호르스트는 베를린 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등이 그의 제자였다. 1802년에는 군사 협회를 설립하여 군 개혁에 대한 논의를 주도했고, 1804년에는 베를린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고급 장교 교육에 힘썼다. 같은 해 병참총장부 재편으로 제3여단장에 임명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패배한 후, 샤른호르스트는 군비재편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군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프랑스군과의 군사력 차이가 조직 및 지휘 통제의 질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하고, 프로이센군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1808년, 군사 관련 부서를 통합하여 군사성을 신설하고, 샤른호르스트는 군사총무국장 겸 제2사단 감독(병참총장)을 맡아 개혁을 주도했다. 의무병역제도를 도입하고, 평민 출신 장교를 적극적으로 채용하는 등 군의 체질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나폴레옹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1811년 샤른호르스트는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이에 실망한 샤른호르스트는 프로이센군을 떠났다.

1813년 나폴레옹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샤른호르스트는 프로이센군에 복귀하여 병참총장 겸 중장으로 해방 전쟁을 지휘했다. 그러나 뤼첸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동맹을 추진하던 중 상처가 악화되어 1813년 6월 28일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베를린에 있는 샤른호르스트 조각상


베를린 인발리덴프리드호프에 있는 샤른호르스트의 무덤

2. 1. 하노버 군 복무 시절 (1755-1801)

1755년 11월 12일 샤른호르스트는 하노버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병대의 하사관이었고, 그 영향으로 샤른호르스트는 군에서 성공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1773년 샤른호르스트는 빌헬름스타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이론 및 군제개혁에 대해서 공부했다. 1778년 하노버군에서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고, 처음엔 기병연대 부속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783년 중위로 승진해 포병학교의 교관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샤른호르스트는 군사에 관련된 다수의 논문잡지, 서적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가 창간하고 편집을 맡은 『군사저널』은 1805년까지 출판을 계속해 광범위하게 유럽에서 읽혀지게 되었다. 1788년 출판된 『장교를 위한 응용군사과학(Handbuch für Offiziere in den anwendbaren Teilen der Kriegswissenschaften)』 및 1792년 출판된 『야전필휴[4](Militärisches Taschenbuch für den Gebrauch im Felde)』는 여러 번 증간되었다. 출간된 서적 모두 높은 평판을 불러 일으켜, 샤른호르스트는 군사이론가로 유명해졌다.

1792년 샤른호르스트는 대위로 승진했다. 1793년 하노버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가하고 샤른호르스트는 포병장교로서 요크 공작 프레더릭의 휘하에서 네덜란드의 작전에 종사했다. 1793년 9월 6일부터 8일에 걸쳐 벌어진 혼드스크트 전투에서 샤른호르스트는 아군의 후퇴를 지원해 첫 전공을 세웠다. 1794년 메닌이 프랑스군에게 포위되었다. 당시 하마슈타인 장군의 휘하에 있던 샤른호르스트는 포위망에 갇힌 아군의 구출작전을 구상해 직접 부대를 이끌고 구원군에 가세했다. 이 작전은 성공해 시내의 아군은 구출되었다. 샤른호르스트의 공적은 높은 평가를 받아, 하마슈타인의 추천으로 소령으로 승진하여 하노버 참모본부에 참가했다. 이때까지의 전투로 샤른호르스트는 단순한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실전지휘관으로서도 유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또한 1803년에는 이 메닌의 공방전을 고찰한 『메닌시 방위(Vertheidigung der Stadt Menin)』란 서적을 출판했다.

1795년 3월 5일 바젤 조약 후 샤른호르스트는 하노버로 귀국했다. 프랑스 혁명군의 승리 요인을 고찰하고 군사저널에 『프랑스 혁명군의 승리원인(Die Ursachen des Glücks der Franzosen im Revolutionskrieg)』이란 제목의 논문을 기재했다. 이 논문 속에서 샤른호르스트는 프랑스군의 강력함은 제일 첫 번째로 뛰어난 조직에 있다고 보고, 그 배경에는 국민국가라는 프랑스 독자의 사회체제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것은 샤른호르스트의 논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되었다. 이미 샤른호르스트의 군인으로서의 명성은 확고했고, 각국에서 초빙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801년 샤른호르스트는 귀족의 칭호와 중령의 지위라는 매우 좋은 조건을 내놓은 프로이센군에서 근무하게 되었다.[5]

2. 2. 프로이센 군으로의 이적 (1801-1806)

1795년 3월 5일 바젤 조약 이후, 샤른호르스트는 하노버로 귀국했다. 프랑스 혁명군의 승리 요인을 고찰하여, 군사 저널에 『프랑스 혁명군의 성공의 원인 (Die Ursachen des Glücks der Franzosen im Revolutionskriegde)』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서 샤른호르스트는 프랑스군의 강점은 첫째로 뛰어난 조직에 있으며, 그 배경에는 국가라는 프랑스 고유의 사회 체제가 있다고 간파했다. 이 논문은 샤른호르스트의 논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해졌다. 이미 샤른호르스트의 군인으로서의 명성은 확고했으며, 각국에서 초빙 요청이 쇄도했다. 1801년, 샤른호르스트는 귀족 칭호(폰)와 중령의 지위라는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프로이센 군에 근무하기로 했다.

프로이센에서 샤른호르스트의 첫 번째 일은 베를린 사관 연수소의 교관이었다. 당시 연수소 소장은 병참총감(당시 프로이센에서는 참모 본부는 병참총감부라고 불렸다) 고이소가 겸임하고 있었지만, 다망한 그는 샤른호르스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샤른호르스트는 연수소의 강의 내용을 대폭 개정하고, 열정적으로 젊은 장교 교육에 매달렸다. 그의 강의를 받은 장교들 중에서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티데만 등 훗날 프로이센 군 개혁에 힘을 발휘하는 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802년 1월 24일(프리드리히 대왕의 탄생 기념일), 샤른호르스트는 동료들과 함께 군사 협회를 설립하여, 프로이센 군의 개혁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 의견을 교환하는 장을 마련했다. 1804년, 샤른호르스트는 연수소의 조직을 재편하여, 기초적인 장교 교육을 담당하는 연수소 외에 고도의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베를린 육군 사관학교(후일 베를린 육군대학)를 설립했다.

이처럼 군 내부의 의식 개혁부터 시작한 샤른호르스트였지만, 군제 개혁은 좀처럼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개혁을 방해하는 큰 원인은 7년 전쟁 이래의 공신들의 존재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아래에서 프로이센 군의 영광을 짊어졌던 구참 장교들은 이미 확립된 기존의 방식을 변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804년, 크리스티안 폰 마센바흐의 제안으로 병참총감부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샤른호르스트는 병참총감부 제3여단장(참모 본부 차장에 해당)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이 시점에서는 명확한 권한이나 책임이 규정되어 있지 않아, 장군의 상담 상대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1806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2. 3. 프로이센 군 개혁 (1806-1812)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에게 대패한 후, 1807년 틸지트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강화했다. 이후 샤른호르스트는 소장으로 승진하고 군비재편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군제 개혁에 착수했다.[4] 그나이제나우, Hermann von Boyen|보이엔de, Karl von Grolman (General)|그롤만de 등 그와 뜻을 같이하는 장교들이 위원으로 임명되어 개혁을 도왔고, 1808년부터는 클라우제비츠도 합류했다.[5]

샤른호르스트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패인을 분석한 결과,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의 군사력 차이는 조직과 지휘 통제의 질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뛰어난 지휘와 프랑스군의 유연한 군사 편성이 승리의 요인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프로이센군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대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프로이센군은 용병 위주의 군대였고, 장교귀족 출신이 독점하고 있어 평민 출신 장교는 출세하기 어려웠다. 샤른호르스트는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자 했다.

1808년, 군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일반군사부와 경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군사경제부가 신설되었고, 샤른호르스트는 일반군사부의 부장이 되어 개혁을 위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프로이센은 의무병역제도를 도입했으나, 실제 징병은 1813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된 후에 이루어졌다.

1808년 12월, 일반군사부와 군사경제부는 통합되어 군사성을 신설하였고, 초대 군사상에는 국왕의 측근인 로툼 백작이 임명되었다. 군사성은 군사총무국과 군사주계국의 두 부국으로 나뉘었고, 샤른호르스트는 군사총무국장으로서 실무를 담당했다. 군사총무국은 국왕의 자문역인 제1사단, 군 통괄을 담당하는 제2사단, 병기 감사를 담당하는 제3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샤른호르스트는 제2사단 감독(국장)을 겸임했다. 이 제2사단은 훗날 참모본부의 원형이 되었으며, 구 병참총감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제2사단 감독은 병참총감으로 불렸다.

1809년, 프로이센군의 편성은 제병과 연합 사단(여단) 중심으로 변경되었다. 샤른호르스트는 각 사단에 참모 장교를 배치하여 중앙 지시의 철저함과 작전 행동 시 독자성을 높이고자 했다. 또한, 그는 평민(주로 부르주아지) 출신 장교를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장교 수요를 보충하고 평민의 군대 참여를 촉진했다. 당시 평민에게 정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던 프로이센에서 군대는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1810년, 샤른호르스트는 육군사관학교를 육군대학으로 개편하고 입학 희망자의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나폴레옹의 경계심을 샀다. 그의 분노를 우려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샤른호르스트에게 개혁 중단을 명령했다. 1811년, 프랑스가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샤른호르스트는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샤른호르스트가 귀국하기 전에 나폴레옹의 압력에 굴복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실망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등 개혁파 장교들은 프로이센군을 떠나 슐레지엔으로 망명했고, 일부는 러시아군에 합류했다.

2. 4. 해방 전쟁과 사망 (1813)

1813년 나폴레옹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샤른호르스트는 프로이센군에 다시 복귀했다. 그는 병참총장(참모총장) 겸 중장으로 승진하여 프로이센군 총사령관 블뤼허 휘하에서 해방 전쟁을 지휘했다.[5] 샤른호르스트는 그나이제나우를 선임참모장교로 임명하여 함께 작전 수립을 담당했다.

같은 해 3월 프로이센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5월 2일 뤼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패배했고, 샤른호르스트는 정강이에 총상을 입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른호르스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상당한 몸으로 으로 향했다.

6월 28일 상처가 악화되어 패혈증에 감염된 샤른호르스트는 프라하에서 사망했다.[5] 그나이제나우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공동으로 추도사를 썼으나, 정부는 그의 업적이 아직 평가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이제나우는 격렬히 항의하여 공표를 얻어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라우프에게 명하여 베를린에 샤른호르스트의 조각상을 건립하게 했다.

3. 군사 개혁의 주요 내용

샤른호르스트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패배한 원인을 분석하여,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의 군사력 차이가 근본적인 조직 및 지휘 통제의 질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뛰어난 지휘와 프랑스군의 유연한 군사 편성이 승리의 요인이라고 분석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프로이센군을 근본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프로이센군은 용병이 주축이었고, 장교귀족 출신이 독점했으며, 평민 출신 장교는 출세할 기회가 없었다. 샤른호르스트는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는 것을 개혁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징병제 도입, 참모 제도 확립, 장교단 개혁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샤른호르스트의 군사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징병제 도입", "장교단 개혁", "참모 제도 확립" 등의 하위 섹션을 참조.)

3. 1. 징병제 도입

1808년 8월, 프로이센은 의무병역제도를 도입했다. 단, 실제로 징병이 실시된 것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된 1813년이었다.[1] 샤른호르스트는 용병 중심의 군대를 징병제 기반의 국민군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예나 전투 (1806)에서 파괴된 프로이센 군을 개혁하여 보편적인 징병에 기초한 국민 군대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록 그가 사망할 때까지 보편적인 징병제가 완전히 확보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징병제의 원칙을 세우고 채택할 길을 마련했다.

샤른호르스트는 단기 복무 후 예비군으로 편입되는 크륌퍼 제도(Krümper System)를 도입했다. 또한 외국인의 군 등록을 폐지하고, 태형을 심각한 불복종 사례로 제한했으며, 실적에 따른 승진을 확립하고, 군사 행정을 조직하고 단순화했다. 향토 방위군(Landwehr, 육군 예비군)의 조직도 시작되었다.

3. 2. 장교단 개혁

1808년 12월, 군사 관련 사무를 처리하는 일반군사부와, 그중에서도 경제 관련 사무를 처리하는 군사경제부가 통합되어 군사에 관한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군사성이 탄생했고, 샤른호르스트는 군사총무국장으로 실무를 담당했다.[1] 군사총무국은 국왕의 상담역인 제1사단, 군의 통괄을 담당하는 제2사단, 병기 감사를 담당하는 제3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샤른호르스트는 제2사단 감독(국장)을 겸임했다. 이 제2사단은 훗날 참모본부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제2사단은 구 병참총감부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제2사단 감독은 병참총감이라고 불렸다.

1809년, 샤른호르스트는 각 사단(여단)에 참모 장교를 배치하여 중앙의 지령을 철저하게 전달하고 작전 행동 시의 독자성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또한 샤른호르스트는 평민(주로 부르주아지) 출신 장교를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이는 참모 장교 배정으로 늘어난 장교의 수를 보충하기 위해서였지만, 결과적으로 평민의 군대 참여를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평민에게 정치 참여가 허용되지 않던 프로이센에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대는 평민에게 매력적인 취업처였다. 1810년, 샤른호르스트는 육군사관학교를 육군대학으로 개편하고, 입학 희망자의 폭을 넓혔다.

3. 3. 참모 제도 확립

1808년 12월, 일반군사부와 군사경제부는 통합되어 군사에 관한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군사성이 탄생했고, 초대 군사상은 국왕의 측근 로툼 백작이 취임했다. 군사성은 군사총무국과 군사주계국의 두 부서로 나뉘었고, 샤른호르스트는 군사총무국장으로 실무를 담당했다.[1] 군사총무국은 국왕의 상담역인 제1사단, 군의 통괄을 담당하는 제2사단, 병기 감사를 담당하는 제3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샤른호르스트는 제2사단 감독(국장)을 겸임했다. 이 제2사단이 후일 참모본부의 원형이 되었다. 제2사단은 구 병참총감부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제2사단 감독은 병참총감이라고 불렸다.[1]

1809년, 프로이센군의 편성은 제병과 연합의 사단(여단)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샤른호르스트는 각 사단에 참모 장교를 배치하여 중앙 지령의 철저한 이행과 작전 행동 시 독자성 향상에 힘썼다.[1]

3. 4. 기타 개혁

1808년, 군사 관련 사무를 처리하는 일반군사부와 경제 관련 사무를 처리하는 군사경제부가 창설되었고, 샤른호르스트는 일반군사부의 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프로이센은 의무병역제도를 도입했다. 단, 실제로 징병이 실시된 것은 1813년이었다.

1808년 12월, 일반군사부와 군사경제부는 통합되어 군사에 관한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군사성이 탄생했고, 샤른호르스트는 군사총무국장으로 실무를 담당했다. 군사총무국은 국왕의 상담역인 제1사단, 군의 통괄을 담당하는 제2사단, 병기 감사를 담당하는 제3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샤른호르스트는 제2사단 감독(국장)을 겸임했다. 이 제2사단이 후일 참모본부의 원형이 되었다.

1809년, 프로이센군의 편성은 제병과 연합의 사단(여단)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샤른호르스트는 각 사단에 참모 장교를 배치하여 중앙의 지령을 철저하게 전달하고 작전 행동 시 독자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샤른호르스트는 평민(주로 부르주아지) 출신 장교를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1810년, 샤른호르스트는 육군사관학교를 육군대학으로 개편하고, 입학 희망자의 범위를 넓혔다. 향토 방위군(Landwehr, 육군 예비군) 조직이 시작되었다.[1]

4. 평가 및 영향

샤른호르스트는 근대 참모 제도의 아버지로 불린다.[1] 군사 이론가, 실전 지휘관, 참모, 교육자, 행정가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하노버군 시절에는 야전 지휘관으로 능력을 보였고, 군사 저널 및 서적 출판을 통해 군사 이론가로 명성을 얻었다. 프로이센 임관 후에는 클라우제비츠를 비롯한 뛰어난 인재들을 육성하고, 프로이센 군의 대대적인 개혁을 성공시켰다.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를 제2의 아버지로 존경했으며, 그의 풍모가 군인답지 않고 오히려 철학자에 가깝다고 평가했다.[1] 샤른호르스트는 평소 우울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젊은 장교들을 친절하게 지도하고 출신에 상관없이 인재를 발탁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5. 샤른호르스트의 이름을 딴 것들


  • SMS ''샤른호르스트''[1]: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해군의 장갑순양함이다.
  • ''샤른호르스트''[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국방군)의 전함이자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네임쉽으로, 자매함으로 ''그나이제나우''가 있었다.
  • 보병 사단 샤른호르스트[1]: 1945년 편성된 독일 보병 사단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창설된 마지막 국방군 부대 중 하나이다.
  • 샤른호르스트 훈장[1]: 구 동독 국민인민군 (NVA)의 최고 군사 훈장이다.
  • ''샤른호르스트'' (F 213)[1]: 1943년 영국 해군의 슬루프함으로 건조되어 HMS ''머메이드''로 불리다가, 1959년 서독으로 이전되었다.
  • 샤른호르스트 거리[1]: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 등 독일 여러 도시에 존재한다.

참조

[1] 서적 A Genius for War: The German Army and General Staff, 1807-1945 Nova Publications 1984
[2] 서적 The Gathering Storm
[3] 백과사전 Gerhard Johann David von Scharnhorst Prussian general https://www.britanni[...]
[4] 문서 야전시 반드시 휴대할 물건
[5] 문서 하노버군에서는 귀족출신이 아닌 샤른호르스트는 많은 차별을 받아 군제개혁의 제안도 후퇴했다.
[6] 문서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참모본부는 병참총장부라고 불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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